놀이가 정말로 즐거운 것은 놀이가 이끌고 가는 모종의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는 재미가 있어서다. 술래를 찾는 술래잡기에서 술래가 집으로 돌아가버리면 놀이는 그것으로 끝난다. 목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달리기도 신기록을 목표로 하면 틀림없이 즐거운 놀이가 되지만 무작정 달리기만 한다면 재미가 있을 리 없다. 현미경에 코를 박는 일도 먼 우주를 끊임없이 바라보는 중독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놀이에는 목표가 있다. 그래서 놀이로 공부하며 연구하고 연습한 사람들은 모두 다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고 내내 즐거웠다고 말한다. 놀이의 재미는 또 하나 있다. 바로 놀이를 통해 맛보는 자유의 즐거움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자유, 마음껏 달리고 더 높은 곳을 오를 수 있는 자유, 연구실에 불을 밝힐 수 있는 자유, 우주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 자유, 그리고 낯섦과 새로움을 찾아 도전하는 자유, 그리고 놀이에 기꺼이 애정을 보낼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이런 자유를 한 번이라도 맛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시 그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진다. 자유가 우리를 행복하게하는 이유이다(그래서 종종 놀이의 목표가 자유를 만끽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놀이는 이처럼 자유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지만 자유 자체가 놀이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놀이가 자유로움만을 목표로 한다면 놀이는 곧 무의미해지고 놀이로서의 기능도 잃게 된다. 오히려 공허한 행위로 기억될 목적 없는 놀이는 결국 자극과 쾌감의 거리를 좁혀 쾌감의 강도를 높이는, ‘이상한 일’만을 반복할 뿐이다. 놀이가 ‘나쁜 놀이’로 인식되게 하는 경우다. ‘좋은 놀이’는 이미 그 자체로 공부가 되고 행위 자체도 자연스럽다. 자유로운 공부가 놀이인 것이다. 그림 그리기는 틀을 벗는 공부다. 그래서 창조력을 기르기엔 더 없이 좋은 공부가 된다. 그림 그리기는 평면에 이미지를 쌓아가는 작업이어서 처음 그린 하나의 이미지는 하나의 의미를 만들지만 더해지는 이미지로 인해 스토리를 낳게 된다. 여기에 새로운 지식이 더해지며 더 많은 의미가 탄생하고 그림을 그리는 이는 이렇게 눈앞에 스스로 만든 새로운 개념(세계)을 보게 된다. 평면위에 그려져 나가며 더욱 입체적인 내용이 생겨나고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단순한 지식에 부피를 얻고 단조로운 감각은 더욱 세련화되고 스스로를 혁신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림 그리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 정화(카타르시스)의 기능은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한다. 놀이는 목표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어느 사이 목표에 도달하는 힘을 가진다. 그림 그리기는 ‘범위가 넓은 의미놀이’이다. 데이빗 엘킨트는 '놀이의 힘'(the power of play 2007, 이주혜 옮김. 한스 미디어)에서‘놀이를 통한 학습’으로 습득놀이, 혁신놀이, 친화놀이, 치유놀이를 주요 놀이학습으로 설명하고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개념과 기술을 새로이 구축해 내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을 새로 만들어내며, 같은 언어나 문화를 공유하지 않고도 같은 또래에선 쉽게 상호감각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그때 수시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치료하는 것도 놀이의 힘이라고 말한다. 성공한 ‘좋은 그림’은 놀이의 자연스러움과 몰입의 흔적을 화면 곳곳에 남겨 놓는다. 마치 대본에 몰입한 배우가 실제를 연기하는 것처럼, 주제(뇌에 그려놓은 표현 내용)를 정확하게 잡고 자신 있는 나만의 방법으로 ‘나의 생각과 느낌’을 그려냈다. 상상이 실제화(아이들은 보여지는 것은 사실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되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이미지의 합, 과장과 생략, 상징을 통해 새로움을 찾아내고, 음악가, 의사와 엄마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친화’를 경험했을 것이다. 미술교육은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작품성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그림은 성공적인 교육적 성과를 드러낸다. 좋은 그림은 그 속에 ‘놀라운 성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낱개로 다양하게 포장된 교육상품을 소비하며 바쁘게 자라고 있다. 다녀야 할 교육시설과 과목이 세분화 되어 그 만큼 만나야 하는 교사의 수도 많아졌다. 학습과 놀이도 구분 되어 따로따로 수강료를 내는 실정이다. 어린이 영어가 국어를 점령하려 하고, 너무 이른 논술공부가 자연스런 글쓰기를 방해하고 있고, 인공적인 체험학습은 별도의 과목으로 자리 잡아 놀이의 신비로운 힘을 잃은 지 오래다. 결과(성적)중심의 학습이 가져오는 과정의 결핍을 알아차린 학부모들이 그 것을 채워 주려는 욕구가 또 다른 소비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아이들은 지금 이런 넘쳐나는 교육상품으로 인해 그 귀한 성장을 낭비하고 있는 중이다. 과목이 세분화 될수록 놀이의 참 뜻이 살아날 수 없다. 대학 시스템을 흉내 내는 아동교육 프로그램에 속지 말아야 한다. 유년기의 미술이 통합교육의 중핵임을 부정하는 교육학자는 거의 없다. 아이들의 미술은 그림 그리기가 중심이며 교육제도가 아무리 바뀌어도 결코 폐지될 수 없는 과목이다. 주요놀이의 기능을 골고루 가지고 있는 공부가 미술임을 새삼 주목하여 그림 그리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