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부모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낳고 키우면서 아낌 없이 사랑한 내 아이가 엄마 아빠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이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증거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사랑은 서로 닮게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서로 길들여지는 여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별로 틀린 말도 아닌 듯 합니다. 대개 아이들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고 부모는 자식에게 애초부터 무릎을 꿇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 정도만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여기에 더해 끊임없이 공감을 요구하고 나섭니다. 쉬지 않고 말을 걸어오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사랑은 공감으로 완성되는 것 같습니다. 머지않아 아이들은 타인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집에 돌아오면 선생님과 친구들에 관하여 쉬지 않고 이야기하고 선생님과 친구들의 행동이나 말씨를 흉내 내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이런 행위는 사랑에 눈을 뜨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은 좋아하는 선생님이 생기고 단짝이 정해지고 드디어 공감의 신비를 경험합니다. 커다란 노력을 들이지 않더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행복감을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특히 아이들은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만나자 마자 친구가 됩니다. 바로 상상을 공유하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즐거워하면 내가 행복해진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아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가만히 놔두는 법이 없어서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놀이에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공감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공감은 사랑의 증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공감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지식의 차이가 있다 해도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특히 상상하는 세계에 함께 빠져드는 순간은 마치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성격의 차이나 세대간의 갈등도 상상력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상력의 차이를 좁혀나가는 것이 바로 사랑의 기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특히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같이 상상해주기를 원합니다. 상품화된 상상을 같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려 자신의 상상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도 아이들의 세계에 초대하는 적극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아이가 상상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 하고 아이들이 열어주는 상상의 문을 들어서기만 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