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미술관은 파리만국박람회의 기차역으로 지어진 곳이라 들어서면서부터 시원하게 펼쳐지는 역사전경으로 인하여 <미술관 산책>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경쾌한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헉?! 오늘은 왼쪽 마네 특별전의 전면에 대형 <투우사의 죽음>이 숨이 막힐듯한 크기로 관람객들을 압도하고 있다. 100년 전 "투우사를 죽인 소는 어디에 있느냐!"며 대중들의 야유를 받던 이 그림이 100년 전에 받았던 냉대와 비난의 무게를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다지 크지 않은 원화에서 느끼던 약간의 섭섭함이 해결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도 반가운 마음이다. 좀 더 나레이티브한 그림 중 죽은 투우사만 다시 캔버스에 옮겨 그린 것인데, 대담하고 극적인 구도로 인하여 조금만 다가서면 투우사의 피가 내 발등 위에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겨울의 회색 빛에 익숙해진 듯한 파리가 어느새 따사로운 햇살을 맞이했는지 세느강변엔 봄 이야기를 마저 다 쏟아내기도 전에 여름의 화려한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이런 날엔 루브르나 퐁피두센터보다 오르세 미술관으로 발길이 간다. 밝은 햇빛 속에 살을 드러낸 듯한 파리지엥들의 삶의 모습들을 담은 인상파의 그림들이 웬지 세느강변의 연장선 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에두와르 마네(Edouard Manet)의 특별전! 국립미술관의 특별전은 줄을 두 번이나 서야 하는 수고가 있지만 결코 놓칠 수는 없는 ‘근대미술의 선구자 마네전!’ 이다. 현대는 새롭지 않으면 주목을 받지 못한다. 너무 많은 새로운 것들을 따라가느라 가끔 방향을 잃어 버릴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변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19세기 당시엔 대중이 원하지 않는 변화는 모욕이었다. 아니 실은 벗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나 싶다. 르네상스 이후 450년을 이어오던 회화의 전통에 인상파 화가들은 낯선 주제와 파격적인 구도, 거친 붓 자국에 자연의 빛을 옮겨 놓는 밝은 색채로 맞섬으로써 변화의 뭇매를 맞으며 기꺼이 하나의 시대를 열어 보였다. 그 선두에 있었던 에두와르 마네는 평론가들과 대중의 무자비한 비난과 악평에 일생을 시달린 동시에 인상주의를 예고하는 당시의 젊은 화가들을 열광케 하였고 오늘날의 미술사는 그에게 최초의 근대화가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있다.전시장의 분위기는 그다지 낯설지가 않다. 익숙한 그림들과 그의 든든한 지지자였던 절친들인 19세기 프랑스의 지성, 보들레르, 에밀 졸라 그리고 마네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클로드 모네등이 관람객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음을 시인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것 같다. 전시장을 한번 둘러보고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을 찾으니 북적거리는 관람객무리들, 역시나 너무도 유명한 <올랭피아>-(Olympia 1863)가 있다.Édouard Manet_Olympia이 그림은 51세로 세상을 떠난 마네 사후 19세기 말, 클로드 모네가 사제를 털어 구입해서 국가에 귀속시킨 작품이다. 마네가 살롱전에 출품했던 당시에는 대중들이 분노의 욕설을 퍼붓기 위해 이 그림 앞에 모여들었지만 오늘의 관람객들은 그 앞에서 깊은 감동을 느낀다. '하늘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 비너스>의 구도에 비너스의 나체 대신 천박한 매춘부의 나체를 그렸다하여 광분해서 그림을 찢어 내리려는 사람들 때문에 높여 달아 상단에 전시를 했다던 이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벗은 사람은 오히려 나 자신인 것 같다. 당시엔 알몸을 드러내고 신사들의 위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발가벗은 나를 바라보는 수치심을 주지 않는 유일한 시선인 것만 같다. 담담하고도 초연하게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나'를 보는 것이다. 이제서야 "나에게 옷 벗은 올랭피아와 옷 입은 올랭피아는 같은 존재다."라고 했던 마네의 말이 떠오른다. 매춘부가 아닌 올랭피아가 지금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전에 없던 빛의 연출방식에 관람객들은 마치 자신이 모욕 받은 것처럼 느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지팡이를 휘둘렀다.과연 예술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성을 돋구는 것이 타당한가?" - 에밀 졸라그리고 또 하나 미술사의 큰 획을 긋게 되는 작품, <풀밭 위의 점심식사>- (Le dejeuner sur l’Herbe). 수 없이 많이 본 작품이지만 원화를 대할 때마다 가슴이 설레인다. 제대로 갖춰 입은 정장의 신사들 사이에 천연덕스러운 자세로 앉아 나를 바라보는 여인의 살갗이 눈이 부시다. 저 정도의 몸매로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히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괜히 기가 죽는다(?). 저 눈빛은 내게 무언가를 할 것 같다. "Elle va nous faire un clin d’œil?!" 1863년 낙선작 전시회에서 저질이라는 악평으로 미술계를 시끄럽게 했던 이 작품은 빛과 어둠의 색채 연출로 인상주의의 단초가 된 근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신사와 숙녀들의 우아하고 평화로운 휴식처인 정오의 불로뉴숲( Bois de Boulogne)의 일상에 매춘부의 출현도 물의가 될 텐데 알몸의 매춘부는 세간의 분노를 살만했을 거다(점잖아 보이는 두 신사들의 알몸이 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웬지 통쾌한 이 기분은 뭘까?). 이 작품은 라파엘로의 원작을 동판화한 라이몬드의 <파리스의 심판>의 한 부분인데, 이 이야기를 사용한 마네의 저의가 참으로 흥미롭다. ‘파리스의 심판’은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홧김에 던진 황금사과 한 개에 의해서 트로이 전쟁까지 발발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무심코 던진 돌멩이 하나에 개구리가 맞아 죽은 이야기이다. 거기까지는 얘기가 되겠지만 19세기에 마네라는 화가가 파리 화단을 전폭시킬 줄은 예상치 못 했을 거다. 당시, 상식을 깨기 쉽지 않은 대중들 중 나이 지긋한 분들은 지팡이까지 휘두르며 광분했다고 한다.에두와르 마네는 파리 생제르맹 데 프레(Saint Germain des pres)의 세련된 도시남자다.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그의 알쏭달쏭한 가족관계처럼 어느 정도의 위선과 향락은 누릴 수 있는 품격일 수도 있다. 그런 그가 전통적인 신화나 역사가 아닌 저급한 풍속화로 치부될 파리의 캬바레나 매춘부등 서민적이고 충격적인 주제로 왕립아카데미 살롱전의 스캔들 메이커로 거듭되는 낙선과 악평을 감수하면서 까지 멈추지 않은 것은 그의 말대로 스스로 '시대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함일까? 그는 이상하게도 인상파라 불리워지는 그룹에 참가하기를 거부했지만, 확실한 것은 모네나 피사로, 르느와르 같은 인상파의 탄생을 위해 에두와르 모네는 그 시대의 준비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배경이 없는 빈 공간에 홀로 서서 피리를 부는 소년. 이 아이는 왜 전쟁터에서 피리를 부는 아이가 되었을까? 6.25 한국전 이후 미군을 따라 다니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전쟁고아들인 슈산보이가 생각난다. 피리 부는 손과 발 외에는 그림자조차 없이 주제만 있는 평면적인 단순함이 어른도 아이도 아닌 아이의 눈빛 속으로 시선을 끌어당긴다. 마네에게 예술은 그 자체로 순수한 것이다. 즉 작품의 주제로 인하여 예술의 존엄성이 손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생전에 자신을 따라 다니는 악평과 조롱으로 괴로워하던 마네에게 보들레르는 이런 말로 용기를 주었다. "자네가 훌륭한 화가임을 내가 선언하네...중략... 자네가 명심해야 할 점은 이런 경우를 자네가 처음 당한 게 아니라는 것일세. 자네가 자신을 샤토브리앙 혹은 바그너보다 더욱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도 한때 자네처럼 조롱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라네." -보들레르